영화 버닝 해석 — 태양의 신, 바다의 신, 그리고 인간

Metaphors, Meanings, Messages, also contains Spoilers

Crimson Kim
6 min readOct 14, 2019

해미, 인간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자연인가? 그러기엔 말 그대로 너무 ‘인위적’이다.
그렇다, 인간은 마치 ‘비닐하우스’와 같이 가공된, 혹은 ‘성형한’ 자연이라고 할 수 있다.

해미는 비닐하우스와 같이 속안이 훤히 보이는 여자다.
슬프면 (비가 내리면) 울고, 기쁘면 (햇빛이 쨍쨍하면) 웃는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태워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

비닐하우스는 물과 햇빛 없이 작동 할 수 없다.
해미는 현실을 빠뜻하게 살아가는 라이트 헝거다.
해미는 햇빛이 하루에 한 번 만 드는 조그마한 방에서 산다.

우물 바깥 세상은 좀 더 낫겠지..
아프리카로 ‘그레이트 헝거’ 또는 ‘이상’ 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태양의 대륙, 아프리카에서 벤을 만난다.

벤, 태양과 불의 신

여기서 벤의 불 (쾌락, 재미 혹은 행복)은,
종수의 아버지의 불 (분노)과 다른 색깔을 띤다.

벤은 슬픔을 모르고 자랐다.
눈물은 가뭄처럼 메말랐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가졌다.

신은 인간을 도움으로써 삶의 의미를 얻는다.
벤은 ‘그레이트 헝거’ 다.
나약한 인간을 불태움으로써 인간을 돕는다고 믿는다.

벤은 쾌락을 추구하지만, 불 같이 타오르고 쉽게 꺼진다 (저절로 하품이 나온다).
그래서 2달에 한 번 정도의 페이스로 계속 요리를 한다.

종수, 바다와 물의 신

잔잔하고 “너무 진지하기도 하며” 깊이가 있다.
무엇보다도, 종수는 물 같이 투명하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색깔이 뚜렷하지 않다. 자신이 작가로서 어떤 글을 써야할지 조차도 모른다.

둘째, 진실되고 순수하다.
그는 자신이 직접 진실을 상대에게 알리기 보다는, 자신 (물)에게서 반사된 상대의 본모습을 투영함으로써 상대가 스스로 진실을 깨닫게 도와준다.
“해미가 못생겼다” 라는 말은 어쩌면 해미가 진실된 종수의 모습을 봄으로써 스스로에게 던진 말일수도 있다.
또한, 벤은 종수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래서 종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종수 역시 신이며, 인간을 도움으로써 삶의 의미를 얻는다.
종수 또한 그레이트 헝거다.
굶주린 자, 즉 라이트 헝거 (해미 혹은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데 삶의 의미를 얻는다.
메마른 우물을 채워줌으로써 삶의 의미를 얻는다. 직업 조차도 사람들에게 물을 공급해 주는 일이다.

종수 이름뜻 해석 1 — 종수 (種樹) “식물 (비닐하우스)을 심어 가꾼다”

종수는 신이지만 인간의 삶에 가깝게 지낸다.
그리고 인간을 사랑하게 되었다.
해미는 엄마와 많이 닮았다 (엄마와 해미만이 우물을 기억한다, 즉 마음의 큰 상처가 있다).

태양, 바다, 그리고 인간의 만남

태양과 바다는 인간을 사이에 두고 대립을 한다.
태양과 바다는 “동시 존재”하며 균형을 이룬다.
그것이 “자연의 도덕”이다.

인간은 행복과 슬픔 두 감정을 동시에 내포한다.
해미는 웃으며, 울며 춤을 춘다.
그 관경을 태양과 바다는 그저 바라만 본다. “판단 하지 않는다”.
노을은 “붉은색 (벤), 남색 (종수), 그리고 보라색 (벤과 중수의 대립)”을 띈다.

아 내가 정말 세상의 끝에 왔구나. 나도 저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다

결국 해미는 태양이 삼켜버렸다.
슬픈 진실 “너는 못생겼어” “너는 창녀야”을 말해주는 종수 보다는 따뜻한 쾌락을 선택했다.

자신을 재물로 받침으로써 그레이트 헝거가 되었다.
연기가 되어 하늘로 불타오른다.
해미에겐 “오늘이 제일 좋은 하루”다.

태양을 삼킨 바다

지저분해서 눈에 거슬리는 비닐하우스들. 걔네들은 다 내가 태워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아. 나는 판단 같은 것을 하지 않아요. 비와 같은 것이에요. 비가 내린다. 강이 넘친다. 비가 무엇을 판단하겠어요?

여기서 비는 종수를 뜻한다.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은 범죄에요 마치 종수씨와 제가 이 대마초를 피우는 것 처럼

그리고 위 대사로 벤은 종수를 “공범”으로 만든다:
“너도 결국 너의 욕구 (해미를 물로 채우고 싶은 욕구, 성욕)를 채우기 위해 해미를 만나는 거 잖아”.

종수 이름뜻 해석 2 — 종수 (從獸) “사냥하다”

종수는 이 사실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어린 모습의 자신이 비닐하우스를 타는 것을 보며 희열을 느끼는 꿈을 꾸기도 하며, 경찰차를 보면 겐히 긴장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 (해미)의 죽음은 물의 신을 분노하게 만드는데 충분했다.
종수는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아버지의 붉은피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잔잔했던 바다는 파도가 되어 출렁인다.

결국 벤을 비닐하우스가 널린 장소로 불러내어 아버지의 칼로 여러 번 쑤신다.

천주교 신자인 벤은 이것을 “물 세례”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는 고통과 슬픔을 음미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종수를 부둥켜 안은 채 죽음을 맞이한다.

종수 이름뜻 해석 3 — 종수 (縱囚) “죄인을 용서하여 석방함”

종수는 자신의 피 묻은 옷과 함께 벤을 재물로 바친다.
그리고 다시 순수한 나체 상태로 돌아왔다.
악을 “심판”함으로써 자신의 죄책감을 정당화 하려는 행위가 아니였을까.

이상과 현실

영화는 종수가 해미의 방에서 글을 쓰는 것으로 끝이 난다.
종수는 무슨 글을 쓰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관객의 “상상”에 맡겼다.

종수는 소설가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일이 종수의 상상 속에서 벌어진 것일까?
그럼으로써 종수는 드디어 “소설의 주제”를 찾은것일까?
해미는 우물을 품고 있는 자신의 엄마이고,
벤은 불 (쾌락 혹은 분노)을 다룰 줄 모르는 자신의 아빠인것일까?
이것 또한 관객의 “상상”에 맡겼다.

해미의 고양이는 실제인가 허상인가?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 처럼, 이것 또한 관객의 “상상”에 맡겼다.

영화란 무엇인가.
현실적이며 이상적이다.
라이트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가 공존한다, “동시 존재”한다.

이 영화를 보고 아무런 감흥이 없었던 사람들은 “라이트 헝거”가 아닐까 조심스러운 비판을 해 본다.
하지만 현실을 빠듯하게 사는 사람은 그들만의 이유와 스토리가 있다.
이 또한 이 영화에서 주는 메시지가 아닐까.

영화의 의미와 메타포는 관객이 만들고
요리하며
그것을 우리가 섭취하고 소비한다.

버닝을 보고 나서 물음표 수십개가 머리에서 번뜩였다.
영화 관람 후 집에 돌아와서 영화의 의미를 한두어 시간 곱게 씹어 보았다.
영화의 의미 해석은 정답이 없다. 여러 답들이 모여 서로 소통하며 영화의 연장선이 된다.

스물 두 살, 한국의 청년으로써 내가 이 영화를 통해 이창동 감독님께로부터 얻은 궁극적 메시지는 이거다:

세상은 수수께끼 — 현실과 주어진 답에 주저 하지 말고, 끊임없이 의문을 품고 질문하며 불타오르라. 그러지 않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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